한국의 제일 사제: 김대건과 최양업의 이야기
1837년 6월 7일 세 명의 조선 신학생이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했습니다. 한양을 출발한 지 6개월 만이었는데, 그 동안에 만주에서 북경을 거쳐 중국 대륙을 종단하는 9000리(3600㎞)의 길을 걷는 동안 계절이 세 번이나 바뀌었습니다. 이 상황을 담은 한 대목은 지난해 출간된 김대건 조선의 첫 사제라는 책에 있었습니다.
세 명의 신학생은 1821년생으로, 동갑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 그리고 한 살 위인 최방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그러나 최방제는 풍토병에 걸려 1837년 11월에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두 사람은 1844년 12월에 신학교를 졸업하여 부제(副祭)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김대건과 최양업의 길이 갈렸습니다. 당시 조선 천주교를 이끌던 프랑스 사제들은 내성적인 최양업보다는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김대건을 먼저 조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김대건은 부제로 조선에 돌아와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를 입국시키기 위해 황포돛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상하이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김대건은 조선인으로서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페레올 주교와 함께 천신만고 끝에 한양으로 돌아와 신자들을 돌봤습니다. 이후, 김대건은 산둥반도에서 백령도까지 입국로 개척을 시도하다가 1846년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5세이며, 사제가 된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습니다.
1849년에는 두 번째 조선인 사제로 서품된 최양업 신부가 있었습니다. 최 신부는 1849년 12월에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였고, 충북 진천의 배티성지를 기반으로 삼남지방(충청, 경상, 전라 지역)의 127개 공소를 돌며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한 해 동안 걸은 거리는 약 7000리(2800㎞)이었으며, 바쁠 때에는 하루에 80~100리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 신부는 1861년 6월에 과로와 장티푸스로 인해 경북 문경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김 신부를 조선의 첫 사제로 꼽아 그의 이야기를 전해왔으며, 그가 조선에 큰 희생을 하였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들 조선인 사제들의 헌신과 희생은 천주교의 역사에 길이 남아있으며, 우리가 그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는 일은 우리 역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세 명의 신학생은 1821년생으로, 동갑인 김대건 안드레아와 최양업 토마스, 그리고 한 살 위인 최방제 프란치스코였습니다. 그러나 최방제는 풍토병에 걸려 1837년 11월에 세상을 떠났고, 나머지 두 사람은 1844년 12월에 신학교를 졸업하여 부제(副祭)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김대건과 최양업의 길이 갈렸습니다. 당시 조선 천주교를 이끌던 프랑스 사제들은 내성적인 최양업보다는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김대건을 먼저 조선으로 보내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래서 김대건은 부제로 조선에 돌아와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를 입국시키기 위해 황포돛배를 타고 서해를 건너 상하이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김대건은 조선인으로서 처음으로 사제품을 받았으며, 페레올 주교와 함께 천신만고 끝에 한양으로 돌아와 신자들을 돌봤습니다. 이후, 김대건은 산둥반도에서 백령도까지 입국로 개척을 시도하다가 1846년 9월 16일 한강변 새남터 모래사장에서 처형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는 겨우 25세이며, 사제가 된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던 시점이었습니다.
1849년에는 두 번째 조선인 사제로 서품된 최양업 신부가 있었습니다. 최 신부는 1849년 12월에 압록강을 건너 귀국하였고, 충북 진천의 배티성지를 기반으로 삼남지방(충청, 경상, 전라 지역)의 127개 공소를 돌며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을 만났습니다. 한 해 동안 걸은 거리는 약 7000리(2800㎞)이었으며, 바쁠 때에는 하루에 80~100리를 걸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 신부는 1861년 6월에 과로와 장티푸스로 인해 경북 문경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김 신부를 조선의 첫 사제로 꼽아 그의 이야기를 전해왔으며, 그가 조선에 큰 희생을 하였음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들 조선인 사제들의 헌신과 희생은 천주교의 역사에 길이 남아있으며, 우리가 그들의 헌신에 경의를 표하는 일은 우리 역사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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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한*
이런 소식 정말 좋아요.
김한*
정말 대책없네요.
박성*
좋은 정보 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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