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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모반사건: 조선 최대 규모의 유혈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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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10-03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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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589년 10월, 선조에게 상소 한 통이 올라왔다. 전주에 사는 양반 정여립이 반란을 꾸민다는 내용이었다.

정여립이 이끄는 대동계(大同契)라는 모임이 활 등 무술을 단련하고 있는데, 겨울철 한강이 얼면 한양으로 쳐들어 오려 한다는 얘기였다. 쿠데타를 통해 병조판서 신립 등 중신들을 죽이고 정권을 잡는 게 정여립의 계획이라고 상소는 주장했다.

놀란 선조는 중신들을 불러모아 긴급 대책 회의를 열었다. 1000명에 가까운 사대부의 목숨을 앗아간 조선 최대 규모의 유혈숙청인 기축옥사(己丑獄事), 이른바 정여립 모반사건은 이렇게 시작됐다.

3년 동안 벌어진 이 사건에서 동인(東人)을 중심으로 1000여명의 인재가 사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떠났다. 조정에 피바람이 몰아치는 동안 조선은 외침 대비에 손을 놨다. 숙청이 끝날 때 즈음 벌어진 임진왜란에선 전란을 수습할 인재 부족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다. 조선 후기 호남 출신 사대부들이 상대적으로 소외를 받은 것도 이 사건과 무관치 않았다.

#2. 정여립이 정말 반란을 도모했는지 여부를 놓고는 역사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서인들이 경쟁자인 동인들을 제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적극 활용한 것만은 분명하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죄가 괘씸죄라고 했던가. 애초에 율곡 이이(李珥)과 가까이 지낸 서인(西人)이었던 정여립이 동인 쪽으로 갈아탄 게 서인들의 심기를 건드렸다.

마침 정여립의 급진적 사상은 당대 공격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천하는 공공의 것이니 어찌 일정한 주인이 있겠는가라는 정여립의 민주적 주장은 주권자가 임금인 왕정 국가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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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


좋은 뉴스 담아갑니다.

김한*


정말 대책없네요.

이동*


정말 최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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